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스 윈턴 (문단 편집) == 종전 이후 == 1939년부터 1988년까지 49년간 자신의 선행을 세상에 숨겼는데, 이는 자신이 마지막 250여 명의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후 그의 선행의 증거를 다락방에서 아내가 우연히 발견했고, 자료를 없애자고 하는 그를 설득한 끝에 세상에 의로운 업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 {{{#!wiki style="margin:-10px; margin-top:-6px; margin-bottom:-6px" [YouTube(6_nFuJAF5F0)]}}}|| ||<#333333><:> {{{#FFF 1988년, BBC의 프로그램 《That's Life》}}} || >사회자: 여기 뒤에 모든 아이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여기에 Vera Diamant라는 아이도 보이네요. 지금 이 목록에서 찾은 [[이름]]인데, 그녀가 지금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베라.(고개를 끄덕이는 베라) 그리고 그녀가 니콜라스 윈턴 씨 옆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씀 드려야겠네요. ... 스튜디오 안에 니콜라스 윈턴 씨에게 도움을 받은 분이 있다면 일어서 주세요(윈턴 씨 주변으로 30여 명 가량이 일어선다. 깜짝 놀라는 윈턴 씨.). 니콜라스 윈턴 경이 구한 669명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가족을 이루어 60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니콜라스 윈턴 경이 구한 이들 중엔 영화감독, 소설가, 이스라엘 공군 건립자 등도 있다. 니콜라스 윈턴 경은 영국에선 1983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하고 2003년 [[기사작위]](Knight Bachelor) 서임을 받았고, 체코에선 2014년 최고 [[권위]]의 백사자 [[훈장(상훈)|훈장]]을 받았다. 니콜라스 윈턴 경의 생애는 그의 생전 3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니콜라스 윈턴 경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당대에 니콜라스 윈턴 경처럼 본인 재산까지 써가면서 목숨 걸고 도와준 사람은 드물었다. 니콜라스 윈턴 경은 '''"가능한 일이라면 방도가 있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자신은 쉰들러와는 달리 [[전쟁]]중에 [[목숨]]을 걸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선행이 쉰들러만큼은 아니라고까지 말하며 겸양을 보였다. 사실 조금 더 자세히 윈턴 경의 개인적 배경을 파고들자면 윈턴 경 본인은 부모 대부터 [[기독교인]]인 데다 조상이 유대인일 뿐이었고, 나치의 [[악의 문제|악행을 보고 나서는 큰 충격을 받아 아예 신앙생활까지 그만둔]] 엄연한 무교인이었다.[* [[유대인]] 항목에도 쓰여 있지만, 유대인의 정체성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유대교를 믿는지 여부이다. 다음으로 큰 요인은 가정교육을 통해 유대인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면이 크기 때문에 가정교육에서 비중이 큰 모계, 즉 어머니의 유대인 여부를 보고 따지게 된다. 윈턴 경은 유대교를 믿지도 않았고 부모님 또한 그러했으니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두텁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유튜브에 한국어로 니콜라스 윈턴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영상은 이런 전후 설명은 쏙 빼놓고 [[개신교/논란/유명인사에 대한 사실 조작|니콜라스 윈턴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기독교 때문에 선행을 한 것처럼 왜곡하는 영상이다.]]] 그렇기에 윈턴 경이 그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혹은 기독교인이어서 그랬다는 식으로 그의 선행에 담긴 인류애적 동기가 부정당할 이유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